“햇살이 가장 중요합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김길만(58) 조각가가 나직하게 한 말이다.
지난 11일 유리벽으로 빛살이 쏟아지는 평산동 카페에서 모래조각가 김길만 씨를 만났다. 얼마 전 미래디자인센터 양산미협전시회에 걸린 사진 하나(등을 보이며 모래작업을 하는 모습)가 눈길을 끌었다. 실내에 작품을 전시할 수 없어 사진으로밖에 남길 수 없는 모래조각이라는 낯선 장르에 호기심이 갔다.
작업실에서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니, 그는 자기에게는 작업실이 없고, 모래가 있는 바닷가, 야외의 모든 백사장이 자기의 작업실이라고 했다. 따로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선입견이 깨졌다. 사람을 만나기 전 먼저 드는 생각들이 깨지는 경우가 잦다. 선입견은 깨질수록 좋다. 그는 차분하게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았다.
그의 인상이나 말하는 태도가 지리산의 어느 시인을 떠올리게 했다.
모래조각은 햇빛의 각도, 양에 따라 모래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빛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는 햇빛과 모래에 홀려 살아온 셈이다. 그는 원래 작사가가 되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돈이 안 드는 재료를 찾다 보니 우연히 모래가 눈에 들어왔고, 모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보니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모래조각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87년도에 시작해 모래로 모양을 만들어 온 지 30년이다. 15년 전까지도, 돈 안 되는 일, 저리 만들어서 없어질 것 뭐하러 하느냐고 자기에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손으로만 모래를 만지다보니 더 섬세한 표현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이들이 먹다 버린 핫도그나 컵라면 젓가락을 이용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었다. 그는 젓가락 하나면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다. 안개 같은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바깥으로 표출되어 모래 위에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을 때 그는 더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 기쁨 때문에 그는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모래밭 위에서의 유희에만 빠져 있지 않는다. 생활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모래밭에 놀던 아이가 해가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가듯, 주 5일은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일요일만 되면 해운대 백사장으로 달려간다.
“한때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래에 매이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셔 보고, 놀러다니기도 했지만, 모래만큼 편안하고, 나다워지고 좋은 게 없더군요.”
모래작업에 대한 그의 얘기를 듣노라면, 티벳 승려들의 만다라 작업이 떠오른다. 화려한 색을 입힌다는 게 다르지만, 모래 조형이고, 완성한 뒤 형체가 흩어져 무無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얼핏 같아 보인다. 매번 쌓았다가 다시 허물어 사라져버리는 것이 예술의 속성이 아닐까.
그의 모래조각에 변화가 온 건 해운대백사장에서 펼쳐진 세계모래축제에서였다.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해보면서 자기의 부족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자기처럼 젓가락으로만 작업을 하는 작가는 없었다. 다들 여러 화려한 작업도구들을 가지고 표현했다. 자기는 삽과 양동이와 물뿌리개만 있으면 되었다. 이제는 젓가락으로 자유자재로 곡선을 표현한다. 예전보다 더 섬세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모래조각이라는 것도 생소하지만, 작가도 3명 정도밖에 없다. 네덜란드에는 모래조각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그는 모래 만지는 게 청소년들의 정서에도 좋은 영향을 주며 치유력도 있다고 했다.
모래는 점성이 없어 형태 만들기가 어렵지 않는냐고 물어보니 물과 목공풀을 잘 이용하면 한 달까지도 원형이 보존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꿈이 뭐냐고 질문하니,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고장에 모래조각테마파크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고, 한 번 휴가를 내어 중국어를 잘 하는 아내와 함께 둔황의 모래사막에 가서 불상을 조각하고 싶다고 했다. 둔황과 모래사막 같은 데서 작업을 하는 건, 해운대나 동해의 백사장에서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리라. 공기도, 냄새도, 모래의 빛깔도, 언덕도, 쏟아지는 햇살의 강약도…. 그는 어쩜 거기서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바다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김길만 작가. 그의 안에는 아직도 어린 소년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소년은 광안리 바닷가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모래를 본다. 모래가 빛으로 소년을 유혹한다. 모래의 유혹에 넘어간 소년은 운동화를 벗고 맨발이 되어 모래밭에 뒹군다. 손으로 모래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모래의 감촉은 한없이 부드럽고 여리고 순종적이다. 모래의 물성이 마음에 든다. 모래밭에서 소년은 자기만의 모래행성을 만든다. 모래밭은 B612, 어린왕자만의 작은 행성, 자기만의 소우주다. 꽃도 여우도, 장미도, 소녀도 소행성의 친구로 들인다. 모래알갱이에 부서지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 이 인터뷰는 황윤영 씨가 운영하는 카페 ‘피카소’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뷰를 하고 난 뒤 후회했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직접 작업하는 것을 보면서 글을 썼더라면 더 생생한 기록이 되었을 텐데, 제대로 김길만 작가에 대해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순전히 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