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토) 대석리 물안뜰 전통 상여의식 재현 행사는 외부 방문객들에게 사라져 가는 공동체 품앗이를 의미 있게 보여주었다. 상여(행상) 재현행사는 죽은 자를 꽃가마 같은데 태워 장지까지 운구하는 절차를 말하는데,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다. 이 행사는 양산시와 농업기술센터와 상북면 단체의 지원으로 추진됐다.
행사 당일은 낮은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마을 가운데로 겨울 초입의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하늘은 청명했다. 물안뜰 마을은 양산나들목에서 가까워 외지인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다. 오전10시 본행사가 시작되기 전 마을 주민들은 손님 맞을 채비로 분주했다. 마을 입구에는 주민들이 만든 생활도자기와 농산물을 진열하고 공동 마당에는 하얀 차일이 쳐 있고 테이블들이 한쪽 편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러 개의 큰 솥에선 김이 피어오르고, 소쿠리에는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부녀회원들의 손길이 바쁜 가운데, 풍물 복장을 한 한말출(59)부녀회장은 말했다. “이번 행사가 5년짼데, 이거 준비하려면 힘들어요, 그래도 나는 매번 북을 쳐요.”
마당 가운데에는 종이 연꽃과 봉황이 화려하게 장식된 상여를 멜 주민 상두꾼들이 서성이고 영정사진도 준비되어 있었다. 영정사진은 가공의 인물로 101세 노인으로 설정되어 편안한 죽음‘호상’이다.
추수가 끝난 군데군데 볏짚을 쌓아놓은 들판은 평화롭게 보였지만, 마을 앞 개울은 물이 완전히 말라 푸석한 바닥을 보였다. 고추, 마늘 등 양념장을 준비하던 김분순(70)씨는 옆의 빈 개울을 보며 말했다.“이번에는 가뭄이 어찌나 심한지, 비 한번 안 왔어요. 저 위 홍룡폭포에서 내려오는 물도 있고, 항상 물이 많은 곳인데, 이런 가뭄은 처음이네.”물안뜰이라는 마을이름도, 물이 많은 개울 안쪽에 있다 해서 붙여졌는데, 지금과는 모순된 상황이다.
차일 한편에선 천성산 자연휴양림 조성 추진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었다.
식을 시작하기 전 풍물패들은 마을길을 돌며 소나무가 있는 당산으로 가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와 길놀이를 했다. 뒤를 이어 불운을 막아주는 액맥이 개념으로 진도에서 온 4명 소녀의 아름다운 북춤을 선보였다. 식순에 의해 김종열추진위원장의 인사와 나동연 시장과 정경효 시의장의 축사와 이종희 시의원의 헌시 낭송이 있었다.
또 흰 옷을 입은 유은주 무용가의 지전춤은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씻김굿의 일종으로 창호지로 만든 수십 장의 종이를 늘어트린 것을 양손에 쥐고 사방으로 휘저으며 추는 춤인데, 망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춤이다.
이렇게 식전 행사는 끝나고 정태화 씨의 장례 진행 설명을 들으며, 3일째 발인 과정으로 들어갔다. 상주와 가족들이 나와 입관을 지켜보고 차려진 제사상에 절을 하고 음복을 한다. 차례로 나동연 시장과 내빈들도 절을 했다. 상주들이 곡을 할 때 여자는 오동나무, 남자는 대나무 지팡이를 땅바닥에 두드리며 ‘아고아고’소리하며 운구 뒤를 따른다. 운구행렬이 장지로 떠나기 전 나동연 시장이 상여 위에 올라가 선소리꾼 자세를 취했다. 최소 12명의 장정이 어깨에 멘 상여는 요동만 칠 뿐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저승길 노잣돈이 적어서란다. 상여 앞 새끼줄에 손님들 너도 나도 초록색 지전을 꽂는다. 새끼줄에 지전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래도 안 떠나자 나시장은 이제 그만 가자고 하고, 적어서 못 간다, 하는 상두꾼들과 실랑이를 벌여 좌중에 웃음을 주었다. 시장이 상여에서 내려오면서 상여의 행렬이 움직였다.
만장기를 든 학생들이 앞장서고 영정을 든 상주가 그 뒤를 따르며,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한다. 이어 상두꾼들이 발걸음으로 박자를 맞추며 선소리를 받아 후렴을 하면서 천천히 구성진 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어야, 어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후렴, 어허야, 어야, 넘자, 넘어). 북망고개로 넘어간다. 인생 일생 춘몽이드냐, 어야, 어야.
만장을 앞세운 장례행렬이 논둑길로 길게 이어진다. 저승길이 가깝고도 멀다.
마당에서는 주민들이 손님들에게 국과 밥을 대접하느라 바쁘다. 쇠고기뭇국과 수육과 떡 등 과일을 내오며 잔치 같은 장례 절차의 마무리를 했다.
이번 행사에는 웅상여중, 양주중학, 양산고, 인제대학교 등의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했다.
전통 상여의식 재현 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한 사무장 정선량(51) 씨는 인력조달이 제일 큰 문제라고 했다. 마을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다수라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잊힌 옛 풍습을 오늘에 되살려 젊은 학생들에게도 역사의 맥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대석리 물안뜰 마을은 공동체문화가 잘 형성된 곳이다. 주위 풍광이 아늑하고 아름다우며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오던 마을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고, 고유의 음식문화를 지켜나가고, 도자기, 풍물놀이 등 취미생활을 하며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도시산업화의 그늘 아래, 농촌의 삶이 뿌리를 지키며 살아가기란 여간 노력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특히 농촌에 아이와 젊은 사람들이 살지 않은 이유 중의 큰 이유 하나가 교육철학과 교육시스템의 문제일 텐데, 이것이 변화하지 않고는 농촌에 젊은 인구가 늘어나기란 어려울 것이다.
“도시에 자식들은 집이 없어가 집 문제가 제일 어렵다는데, 여기는 나 홀로 30평에 사는데, 집이 남아돌아 탈이다.”
마을 어느 주민의 말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