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솔직하게 얘기할게.”
이런 말로 서두를 떼면서 상대방이 고백 투의 얘기를 할 때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은 사람의 말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연이나, 사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어금니 아빠’의 실상도 그렇다. 그는 천사표 아빠로 언론에 의해 미화되면서 전국에서 쏟아진 대중의 관심과 후원금을 받았다. 또 자신의 처지를 한껏 이용해 이벤트성 홍보를 하고, 자원봉사자의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키면서 실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쉽게 숨길 수 있었다. 사람의 인식에 한 번 각인된 이미지는 그 잔상이 오래 남아 판단에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 저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하고 이성적 판단을 하기 전에 상대방을 먼저 감성적으로 판단해버린다.
취재 시 맞닥뜨리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여지는 게 1차적인 팩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팩트라는 것도 양파 속 같아서 몇 겹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을 때가 많다. 겉껍질만 보고 1차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느냐, 몇 겹의 껍질을 더 벗겨 내밀한 속살을 내보이는냐로 진실의 향방이 달라진다.
이와 같이 말에도 수많은 겹이 있다. 마음에도 여러 층이 있다. 겉으로 단순해 보이는 말일지라도, 밖으로 건네지는 말에는 이미 겉으로 전달된 뜻 외에 거기에 내포된 여러 마음의 층이 내포되어 있다.
가령 단순한 예로, 지금 몹시 배가 고파 먹고 싶은 데도, 눈치가 보이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먹고 싶지 않다고 거짓된 표현을 할 수도 있다.
이렇듯 거짓과 진실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다. 먼 듯하지만, 서로 등을 붙이고 있는 샴쌍둥이처럼 아주 밀착되어 있다.
말(言)은 붙잡지 못하는 새다. 한번 날아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새. 그래서 따로 녹음 저장하지 않는 한 말의 진실여부는 알 수 없다. 둘만의 대화에서 그때 나는 분명히 이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상대방은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손사래를 치거나,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거나, 네가 잘못 들었어, 라고 말하면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 녹음된 말도 편의를 위한 거짓일 수 있다.
그러니까 언론매체에서 쏟아지는 팩트라는 것들, 감정에 호소하는 것들 100% 믿지 마라. 적어도 유포된 말의 진의를 깎아서 들을 줄 아는 이성을 가져야겠다. 무조건 맹종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