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송스님 칼럼] 운력
[무송스님 칼럼] 운력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8.10.2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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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스님
무송스님

스님들이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을 운력이라 한다. 내가 해운정사에 살 때에는 운력을 비교적 자주 한 것 같다. 조실스님과 명언스님 두 분이 앞장서서 운력을 하시니 대중스님들이 운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운력을 안 하려면 걸망을 싸야 한다 하루는 운력을 하는데 건물을 철거하면서 정리하는 것이었다. 쓸만한 빨간 벽돌은 재활용하러 한곳에 모우고 이것저것 치우고 있는데 마침 담장도 없는 골목길에 엿장수 아저씨가 지나가서 돈 될 만한 거 가져가라 했더니 엿장수 아저씨도 같이 운력을 하게 되었다.

한참동안 엿장수 아저씨가 운력을 같이 하고 가져갈 것을 모으고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더니 조실스님에게 손짓으로 오라는 시늉을 하면서 어이~중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운력을 하던 대중스님들은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대놓고 웃을 수도 없고 해서 서로 쳐다보며 킥킥거리기만 했다. 조실스님은 특유의 표정을 지으시며 엿장수가 부르는 소리를 못본체 했고 원주스님이 잽싸게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나도 해운정사에 처음 왔을 때 대중스님들이 운력을 하고 있어서 객실을 물어보려 중물이 가장 잘 들어 보이는 스님에게 다가가 객실이 어딥니까 하고 물었는데 엿장수 아저씨도 스님들 가운데 제일 뛰어난 스님을 보고 중 대장인갑다 싶어 어이~중 하고 불렸으리라. 엿장수 눈에는 큰스님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다 똑같은 중으로 보여 중대장 같으니까 흥정을 하려고 어이~중 하고 불렀을게다.

또 하루는 운력을 하다가 명언스님께서 해운대 구청장이 충무시장으로 갔다면서 하향적 인사라고 하길래 내가 구청장이 시장으로 갔으면 조실스님에게 상향적 인사지요 했더니 조실스님께서 그렇다 하시며 용화사 스님이 송광사 가니까 왜 그렇게 폭싹 늙었느냐고 하시길래 내가 순간적으로 답을 못했다. 운력을 마치고 좌복위에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조실스님의 은사스님에게 폭싹  늙었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아마 송광사 방장이라는 명예욕에 치우쳐 폭싹 늙은 거 아니냐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

상좌로서 은사스님을 까는 거 같아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중스님들 있는데서 폭싹 늙었다는 표현은 지나치신 것 같아 은근히 본전생각이 나서 찝찝해 하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사를 수하고 조실스님께 쳐들어가서 큰절 3배를 올리고 소나무 껍질이 왜 거친 줄 아십니까? 라고 물으니 어째서 거친고 하시며 되묻기에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하려고 거칩니다 라고 답을 했더니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고 라며 또다시 묻길래 어제 운력을 할 때 스님께서 은사스님에게 폭싹 늙었다는 말씀을 하시길래 떠올랐습니다 라고 말씀 드리니 조실스님은 아차 싶었는지 얼른 합장을 하고 정진 열심히 하십시요 라고 말했다.

내 은사스님은 청정율사 스님이셨다. 해인사 일타 큰스님께서 내 은사스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얌전해지는 것을 보고 은사스님의 법력을 알 수 있었다. 불국사 월산 큰스님과는 같은 이북이 고향인지라 친하게 지내셨다. 월산 큰스님 칠순 잔치에 초대를 받으셔서 공양을 하게 되었는데 월산 큰스님께서 짖궃게 송광사 방장 한잔해 하면서 맥주 곡차를 주시니 얼떨결에 받아 마시고는 우웩하고 바로 토하시니 월산 큰스님께서 껄껄껄 웃으시며 타고난 율사라며 이후에는 절대로 곡차를 권하지 않으셨다.

우리 스님은 절대로 바깥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으며 외출할 때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시다가 공양시간이 되면 길가에 차를 세우고 논두렁 같은 데서 퍼질러 도시락을 드셨다. 나도 은사스님 따라 다니면서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은사스님은 온천을 좋아하셔서 온천을 지나가게 되면 온천 목욕을 하셨다. 하루는 수안보 온천을 지나면서 온천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목욕탕에 손님이 없어서 한가로웠다. 나는 은사스님 때밀이를 해주고 싶어서 은사스님에게 때밀이 대에 올라가시라고 권하니 한사코 남의 영업장소에 함부로 올라가면 안 된다며 거부하시기에 강제로 괜찮다며 밀어 올리니 마지못해 올라 가셔서 때밀이를 해드렸다. 평생을 율사스님으로 사셔서 피부가 백옥같이 뽀얗고 어린아이 피부 같았다.

내가 은사스님을 은사로 정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송광사에서 행자반장 하면서 내 바로 밑에 있는 2번 행자가 어찌나 나를 괴롭히는지 참다 참다가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쑥 나가 2번 행자 눈탱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올랐다. 순간적으로 저질러져 황급히 사죄하고 참회를 했지만 2번 행자는 참회를 받아주지 않았고 날 쫓아내려고만 했다. 큰일났다 싶어 여기서 쫓겨나면 안 되는데 싶어 2번 행자에게 사정사정하며 계란으로 문질러 시퍼런 기운을 빼자고 했더니 요놈 잘 걸렸다며 이제야 내보낼 수 있겠구나 라며 의기양양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나를 압박했다.

꼼짝없이 쫓겨나게 되어 고민하다가 내 스스로 나가지는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그때는 행자실 인원이 12명이나 되어 후원 소임을 마치면 차수하고 줄지어 법당에 예불하러 가고 행자수칙이라는 규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1번 행자가 행자반장이 되고 2번 행자가 율반장이 되어 행자실을 운영했다. 리더 행자반장과 율반장이 싸워서 눈티반티가 되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언제 쫓겨나나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던 중 매주 수요일 저녁예불 마치고 삼일암으로 방장스님 특강을 받으러 가는 날이 돌아왔다.

방장스님 특강을 받고 행자실로 돌아와 휴식을 취할 때 아무도 모르게 삼일암 방장스님 방에 가서 큰절3배 올리고 은사스님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라고 여쭈니 방장스님께서 흐응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시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순간 나는 조실부모하여 아버지 정을 모르다가 아버지 정이 이런 것이 아닐까 라는 느낌을 받았다. 1번 행자 은사스님이 정해지자 2번 3번 행자등 계받을 행자님들의 은사스님이 빠르게 정해져 일사천리로 수계식이 진행되었다.

은사스님은 참으로 근엄하시고 자비로우셨다. 통영 용화사에서 은사스님 입적소식을 듣고 한걸음으로 삼일암에 달려가니 입관을 하고 계셨다. 막 관에 넣으려는 은사스님 옷을 평생 간직하려고 한 벌 챙기고 은사스님 책상도 내가 챙겼다. 은사스님 기억 중 잊지 못할 추억은 은사스님 다비식을 할 때 비가 몹시 내려서 천막을 치고 다비를 했는데 상좌들이 밤새 다비장을 지키며  다비를 지켜보고 있는데 한 곳에서 연기가 몹시 나서 불쏘시개로 뒤적이니까 은사스님 창자가 보였다. 은사스님께서 인생무상을 일깨워 주시려고 창자까지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나의 은사스님에게 폭싹 늙었다는 표현에 거부반응이 일어난 것이었다. 소나무 껍질의 거칠음을 비유로 겉모습만 보고 폭싹 늙었다고 한 것은 잘못 표현된 것으로 정리하고 조용히 해제를 맞아 걸망을 쌌다. 조주스님께서 나이 80에 만행을 떠나시면서 3살 먹은 아이에게도 배울 것은 배우고 80 먹은 노인의 잘못도 일깨워 주셨다.

송광사 수선사에세 정진할 때였다. 은사스님께서 방장으로 계셨기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해제 3일 전에 죽비를 놓고 해제 준비를 하는데 은사스님께서 해제 때 수좌스님들이 막행막식 하니까 계율을 쫌 지키라고 율사스님을 불려다가 율 특강 운력을 붙이셨다. 수좌스님들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방장스님 명령이니 안 따를 수가 없었다.

율사스님이 율 특강 운력을 하다가 원효스님도 파계했으니 중이 아니다 라고 말하자 수좌스님 한분이 원효스님이 중이 아니면 뭐꼬라는 질문을 했는데 율사스님이 답을 못해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방장스님께서 얼른 오늘은 여기까지 라고 말씀하시며 해산시켰다. 원래는 해제 3일 전 죽비놓으면 해제 때까지 3일간 율특강 운력을 할 계획이셨는데 하루만에 박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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