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7단 높이 7.15m 정상 타원형 피라미드
200여년 전 '왕산사기' 통해 왕릉 확인
종친회 지극정성 관리 불구 공식복원 절실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
지리산 산맥 동부능선이 백두대간을 따라 오르다 끝을 맺는 지점에 경상남도 산청군 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왕산은 아득한 고대 가락국(금관가야) 구형왕과 군사들의 비장함이 서린 역사의 산이다. 서기 560년경 가야의 역사가 사라질 무렵 연맹체를 형성해 가야 부활을 꿈꾸었던 가락국 구형왕의 고적지와 왕의 혼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 석총대릉에 잠들어있다. 영토분쟁이 치열했던 고대 사국 격변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찬란했던 선진 문화를 일구었던 가락국의 '구형왕' 그 마지막 역사를 더듬어 본다.
-편집자 주-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는 국내 유일의 석총대릉인 구형왕릉(국가사적 제 214호)이 있다. 이 능은 가락국 제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능으로, 왕의 존호는 양(讓)이며, 왕비 계화왕후와 세 아들 세종(世宗), 무력(武力), 무득(武得)을 두었으며, 흥무대왕 김유신(興武大王 金庾信)장군의 증조부이다. 구형왕은 서기 521년 가락국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나라를 양위하기까지 11년 동안 왕으로 재위하였다.
신라의 침입에 "국토로 말미암아 백성을 상하게 함은 차마 볼 수 없다"하며 양민지도의 이념으로 나라를 양위하고 지품천 방장산 시조대왕의 태왕궁지인 수정궁에 은거하여 수년 후에 승하하니 석릉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양왕(구형왕)의 석릉은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7단의 높이 7.15m로 이뤄져 있으며,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돌을 쌓아 올려 정상부분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새들도 왕릉 위로 날지 않고, 짐승들도 드나들지 않으며, 칡넝쿨과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 영험함이 전해지는 왕릉은 천수백년 동안 가락국 구형왕의 혼을 담고 있다.
가락국은 김해를 중심으로 동으로 낙동강을, 서북으로 지리산을, 동북으로 가야산을 그 영역의 경계로 하였으나 4~5세기경에는 낙동강 상류인 상주와 선산 일대, 대구, 창녕, 밀양, 양산,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과 소백산 줄기, 섬진강 유역의 전라지역까지 매우 넓은 지역을 확보하여 강성한 나라를 이룬다. 하지만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던 가락국은 491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끝을 맺지만 562년 가야 멸망 시기까지 연맹국을 결성하고 가야 부활을 주도했던 구형왕은 그 중심에서 고대 전쟁사 비운의 왕이 된다.
왕과 관련된 역사 사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고대사료는 부족하나 수년 동안 가락종친회와 지역의 사가들에 의해 왕의 행적과 능의 수호내력, 흩어져 있는 전설, 설화 등이 다소 정립되어 있어 왕과 왕산 고적에 대한 역사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헌으로 나타나 있는 왕릉의 역사 사실은 조선 전기부터 세종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78), 동국여지승람(1656), 산청현읍지(1744), 대동여지도(1864) 등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 성대중 조진관(1739~1808)의 양왕릉 심릉기와 문인 홍의영(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도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고, 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어 있다'라는 문헌 내용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내용으로는 왕산사기(王山寺記)는 왕산아래 있는 구형왕을 수호하던 왕산사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으로 조선 중기 고승 탄영이 효종 원년에 작성하였다고 전한다. 탄영은 그 후 숙종 13년 방호산인 형곡당 복한이 수정암기를 지었을 때 그의 문인으로써 글을 쓰기도 하였다.
왕산사기에서 구형왕릉에 대한 기술 내용을 보면 '산양현의 서편 모퉁이자, 방장산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으니 왕산이라 하고, 절이 있으니 왕산사라고 한다. 산상에는 왕대가 있고, 산하에는 왕릉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왕릉 수호를 맡으므로 왕산사라 하는데, 절은 본래 왕의 수정궁이었고, 능은 이에 가락국 제 10대 구형왕께서 묻힌 무덤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왕산사기는 1798년 산청 좌수 민경원에 의해 왕산사 목함에서 발견이 되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덕양전지의 내용으로 보면 민경원은 산청 좌수로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큰 비를 만나 왕산사에 들어갔다 우연히 절 한켠에 있던 목함을 보고 그것을 열게 하였다. 절의 스님들이 나서서 목함에 손을 대면 목숨을 잃는다고 하며 극구 만류를 하였지만 민경원은 뿌리치고 궤를 열어 보았더니 그곳에서 왕과 왕후의 의복과 칼, 왕의 역사를 기록한 왕산사기 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왕릉이며 절이 왕의 명복을 빌던 월찰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 왕릉 수호를 통한 입증 문헌의 내용으로 '신라 문무왕이 30경의 식읍지를 내려 왕릉을 수호하고 왕산사를 중소하라는 명을 내렸고, 고려 신종 때 진양공 최우가 진각국사로 하여금 왕릉을 중수했으며, 인조대왕(1624) 때 스님 운석(韻釋)과 인종(印宗)이 해순(海淳) 선사와 함께 능을 중수하여 인조 9년(1631)에 그 일을 완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헌종 때 권돈인(영의정), 조인영(영의정) 등 조정의 관료들에 의해 왕릉을 수호하기 위한 조정 문서, "비국장재문"을 비롯하여 경상도 관찰사, 산청 현감 등의 재음이나 서장이 있으며, 김해부사 성재 허전의 왕산 고적지, 그것을 편저한 1928년 작성된 민치량의 왕산지에 이르기까지 왕릉수호를 위해 역대 문인들과 관료들의 행적에서 왕릉을 입증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현재 구형왕릉의 주위 인근 해발 429m 지점에 암벽 동쪽 능선에 흩어져 있는 각석 등에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의 각석 한 개는 왕릉의 우측에 있는 호능각 뒤쪽 화강암 단면에 새겨져 있다. 모두 15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락국 구형왕릉이 있던 곳이다. 숭정 후 3년 지난 정묘년(1807) 삼월에 기록했다'라고 새겨져 있다. 두 번째 각석은 구형왕릉 동쪽편의 암벽에 각자되어 있다. 암벽은 상당히 급경사면에 위치하고 각석 좌측 편에 석함이 있는데, 왕릉 앞쪽 절벽에 세로 70cm, 가로 40cm의 석문이 있고 이곳 석실에서 칼, 제기, 족보, 갑옷 등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석함은 장보암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각석은 25자로 이루어져있다. 흔히 김해김씨 족보를 석장대보라 일컫는데 이는 이 석함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세 번째 각석은 구형왕릉에서 왕산사지로 가는 포장도로의 동쪽 능선에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각자는 바위 일부를 치석하고 각자되어 있었는데 모두 18자로 '가락국 태조왕의 유지'라고 새겨져 있다. 이들 각석들은 2006년 경남문화재단의 지표조사 시 검증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한반도 남단에 찬란한 역사의 꽃을 피웠던 가야. 우수한 문화를 일구었던 철의 왕국 가야가 고대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500여년의 역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아직도 그 역사의 맥은 지역민들과 가락국의 후손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현재 가락국양왕덕양전과 가락종친회에는 전 구형왕릉의 올바른 역사적 고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구형왕의 역사정립을 하기 위해서도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대 가락국의 종묘이자 700만 가락후손들의 성지요, 역사의 고장 산청의 고대역사 사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구형왕릉"은 이제 한국 고대사의 중심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경남의 가야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잠정등록 준비를 하고 있는 이 중요한 시점에 김해를 비롯하여 경남 일대 수많은 가야유적지들 역시 새롭게 조명받아야 하며, 후기 가야의 구형왕 유적이 형성되어 있는 산청 역시 가야사의 중심에서 빠질 수 없는 지역으로 현재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가야문화유산들이 훼손되지 않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며, 산청의 고대역사도 명확히 정립할 시기라 본다.